부드러운 배제: 사회가 너무 친절해서 당신을 포용하지 못할 때
친절한 사회만이 가할 수 있는 특별한 잔인함이 있다. 잔혹한 체제는 당신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다. 능력주의적 민주주의는 더 세련된 일을 한다 — 당신을 살려두고, 발언의 자유를 주고,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도록 조용히 배치한다.
능력주의, 정치철학, 그리고 포퓰리즘의 구조적 기원에 대해 계속 생각해왔고, 이것들을 명확하게 정리해보고 싶다. 논지는 단순하지만 불편하다: 사회가 친절해질수록,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더 정밀하게 상처 입힐 수 있게 된다.
자연의 추첨
존 롤스는 파괴적으로 정직한 전제 위에 정의론을 세웠다 — 인생의 출발점에서 스스로 ‘벌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재능, 근면한 성격, 기질 — 모두 롤스가 “자연의 추첨(Natural Lottery)”이라 부른 것의 결과다.1 지적으로 태어나는 것, 야심을 갖는 것, 책이 있는 가정에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제비를 뽑았을 뿐이다.
이것은 결정론적 주장이 아니다.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롤스가 말하는 것은,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불균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책과 식탁에서의 토론이 있는 집에서 자란 아이에게 “학교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생존 자체가 교육과정인 집에서 자란 아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이 전제에서 롤스는 유명한 차등 원칙을 도출했다 —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이다.2 재능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깊은 의미에서 그것은 공유 자산이다 — 사회가 권리를 가진 행운의 당첨이다.
급진적인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능력의 오만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사회가 공식적으로 능력주의를 지지하면서 롤스적 단서를 조용히 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추적한다.3 능력주의 경쟁의 승자들 — 학력을 갖추고, 인맥이 있고, 인지 능력에 혜택받은 사람들 — 은 자신의 성공이 당연한 보상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행운이 아니라.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보상으로.
이 믿음이 샌델이 “능력의 오만(hubris of merit)”이라 부르는 것을 낳는다 — 성공했다면 스스로 번 것이고, 다른 이들이 실패했다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 그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용인되는 편견”이라 부른다.4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비난받는 시대에, 학력차별 — 대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경멸 — 은 용인될 뿐 아니라 찬양되고 있다. “코딩을 배워라”는 조언이 아니다. 선고다.
피해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선다. 샌델은 미국의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으로 압박받을 뿐 아니라 모욕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노동자로서 사기를 꺾이고, 인간으로서 굴욕을 당하고 있다.”4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의 “절망사(deaths of despair)” 연구 —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미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 중독 — 는 이 주장에 실증적 기반을 제공한다.5 사람들은 소득만 잃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감각, 자신의 기여가 중요하다는 감각, 자신이 속해 있다는 감각을 잃고 있다.
보이는 불평등과 보이지 않는 불평등
자연의 추첨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고 실험이 있다. 철학 학위는 필요 없다.
오타니 쇼헤이를 생각해보자. 그의 몸은 눈에 보이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우리와 다르다. 키, 속근 섬유 밀도, 고유수용성 감각의 협응 — 이것들은 유전적 추첨의 선물이며 너무나 명백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오타니에게 “불공정한 이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표를 산다. 경외감을 느낀다. 불평등은 거대하지만,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날씨를 받아들이듯 자연적 사실로 처리한다. 훈련해서 193센티미터가 될 수는 없다. 누구나 이것을 안다.
같은 논리를 인지 영역에 옮겨보자. 추상적 추론 능력, 복잡한 규제 구조를 작업 기억에 유지하는 능력, 통계 모델을 해독하는 능력 — 이것들도 상당 부분 유전과 초기 환경의 산물이다. 신경과학은 이 점에서 명확하다. 인지 능력의 분산은 운동 능력의 분산과 적어도 같은 정도로 유전적이다.6 롤스의 용어로 말하면 같은 추첨, 같은 제비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하기를 거부한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교육이 평등화한다”는 것이다. 더 열심히 공부해라. 더 많이 읽어라. 대출을 받아서 학위를 따라. 모든 교사와 모든 채용 담당자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지적 경기장은 칙령에 의해 평평하다고 선언된다.
지적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 실력이 아닌 운으로 —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보이는 불평등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잔인함을 만든다. 오타니에게 삼진을 당했을 때, 존엄을 유지한 채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몸에 진 것이다. 그 패배에 도덕적 판결은 따라오지 않는다. 하지만 자격 시험에 떨어졌을 때, 정책 논쟁을 따라갈 수 없을 때, “코딩을 배운” 누군가에게 일자리를 빼앗겼을 때 — 더 노력했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시스템 안에서 — 실패는 인격에 대한 심판이 된다. 운이 나쁜 게 아니다. 게으른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 당연한 결과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가장 깊은 사기다 — 보상하는 바로 그 불평등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체적 우월함은 인정되고 찬양된다. 인지적 우월함도 인정되고 찬양된다. 그러나 타고난 것으로 허용되는 것은 신체적인 것뿐이다. 인지적인 것은 “획득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인정하면 승자가 정의롭다고 느끼게 해주는 도덕적 아키텍처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적 추첨의 패자들은 패배보다 더 나쁜 것을 받는다. 비난을 받는다.
부드러운 배제
여기서부터 샌델의 분석을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부분이다.
사회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역사적으로 세 가지 구성을 생각해보자.
원시 사회는 도태로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가지 못하면 죽었다. 잔혹하지만 적어도 정직하다 — 포용의 가식이 없다.
권위주의 체제는 도구화로 해결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도구가 되었다 — 강제 노동, 징병, 산업 기계의 톱니바퀴. 강제된 역할이었지만, 시스템이 인정하는 목적이 존재했다.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진정으로 새롭고 진정으로 기이한 일을 했다. 생존을 보장한다. 발언권을 보호한다. 강제 노동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 특정한 종류의 인지적 유창성에 의존할 만큼 복잡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실질적인 의사결정 참여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고 쉽게 획득할 수도 없는 자격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부드러운 배제라 부르고 싶다. 힘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복잡성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방은 전문용어로 가득 차 있다.
메커니즘은 이렇다 —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들과 시스템 안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벌어진다. 정책 문서는 수백 페이지의 전문용어로 작성된다. 금융 상품을 이해하려면 대학원 수준의 수학이 필요하다. 행정 서비스 신청 절차조차 관료적 문해력의 시험이 되었다. 시스템은 이론적으로 모두를 위한 것이다. 실제로는 그것을 설계한 계층만 해독할 수 있다.
이것이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특유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 자유는 있지만 주체성이 없는 경험.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화가 접근할 수 없는 레지스터로 이동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엔드와 프론트엔드
이 문제를 시스템 아키텍처 용어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유가 거의 민망할 정도로 정확하기 때문이다.
모든 복잡한 시스템에는 백엔드 — 결정이 내려지고 최적화되고 실행되는 로직 레이어 — 와 프론트엔드 — 사용자가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는 인터페이스 — 가 있다. 잘 설계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프론트엔드가 직관적이기만 하면 백엔드는 아무리 복잡해도 된다. 사용자가 상품을 검색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정규화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현대 민주주의 거버넌스는 이 설계 원칙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백엔드 — 재정 정책, 규제 프레임워크, 국제 무역 협정 — 는 엄청나게 정교해졌다. 그것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재능이 있고, 종종 정말로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론트엔드 — 일반 시민의 생활 체감, 시스템이 자신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 — 은 사용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저하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통찰이 있다 — 프론트엔드가 고장 났을 때, 사용자는 프론트엔드를 탓하지 않는다. 시스템 전체를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포퓰리즘의 정체다. 자유주의 논객들이 흔히 시사하듯 교육의 실패나 무지의 증상이 아니다. 인터페이스가 적대적이 된 시스템에 대한 합리적인 UX 반응이다. 왜 자기 마을이 공장을 잃었는지, 왜 건강보험이 매년 비싸지는지, 왜 자녀들이 집을 살 수 없는지 — 제시되는 설명을 해독하려면 경제학 박사가 필요할 때 —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을 내쫓고 적어도 자기 말로 이야기해주는 누군가로 교체하는 것은 합리적인 반응이다.
비극은 그 대체자가 보통 백엔드를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 설계의 문제이지, 사용자의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다.
인정의 격차
롤스는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예견했다. 그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인정에 관한 것이다 — 모든 사람의 삶을 동등하게 배려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루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 차등 원칙은 돈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사회가 가장 불우한 구성원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관한 것이다 — 당신은 중요하고, 시스템은 당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배치되어 있다.
능력주의는 반대의 메시지를 보낸다. 경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면, 당신은 중요하다. 그리고 증명할 수 없다면 — 자연의 추첨이 정책 메모를 쓰는 것보다 엔진을 수리하는 데 더 적합한 두뇌를 주었다면 —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시스템에 대한 당신의 관련성은 기껏해야 간접적이다.
샌델은 “노동의 존엄성” 회복을 주장한다 — 기여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트럭 운전사와 간호사와 목수는 실패한 전문직이 아니라 공유 프로젝트의 필수적인 참여자라는 감각.3 케이스와 디턴은 의미의 위기로 프레이밍한다 — 죽이는 것은 빈곤만이 아니라, 한때 비엘리트의 삶에 일관성과 목적을 부여했던 사회적 구조들 — 노조, 교회, 안정적인 결혼, 커뮤니티 기관 — 의 파괴다.5
둘 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논점을 한 걸음 더 밀어붙이고 싶다. 문제는 특정 종류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인정의 메커니즘 자체 — 현대 사회가 누가 들려야 하는지, 누가 정책을 형성해야 하는지, 누가 완전한 참여자로 느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방식 — 가 단일 축에 포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지적 분석 능력. 추상으로 논증할 수 있으면 안에 있다. 할 수 없으면 밖에 있다. 폭력적으로가 아니라. 부드럽게. 완전한 복지와 함께, 영향력은 제로.
무엇이 필요한가
깔끔한 답은 없다. 정직한 대답은, 부드러운 배제가 복잡한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지 패치로 고칠 수 있는 버그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출발점은 롤스의 자연의 추첨에 대한 통찰이라 생각한다 — 철학적 호기심거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재능이 운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 정책 분석가가 규제 문서를 해독하는 능력이 정비사가 소리로 엔진 고장을 진단하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번 것이 아니라면 — 인정의 아키텍처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돈의 재분배만이 아니다. 존중의 재분배. 누군가의 관점이 들을 가치가 있다는 전제의 재분배.
샌델은 대학 입시에 추첨 제도를 제안한다 — 자격을 갖춘 후보자 풀에서 순위를 매기는 대신 무작위로 선발하는 것.3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논리는 순수하게 롤스적이다 — 자격을 갖춘 후보자 간의 차이가 대부분 자연의 추첨의 산물이라면, “실력”으로 순위를 매기는 척하는 것은 주로 승자가 정당성을 느끼게 하는 허구다.
더 깊은 과제는 시스템 설계의 메타포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프론트엔드가 필요하다. 수준을 낮춘 정책이 아니다 — 그것은 시혜적 태도일 뿐이고, 미소를 단 부드러운 배제에 불과하다. 진정한 번역 레이어 — 복잡한 거버넌스를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해독 가능하게 하고, 비전문가의 지식이 백엔드로 흘러들어가는 채널을 만드는 제도와 관행이 필요하다.
공장을 잃은 마을은 경제학자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망가진 보험 시스템을 헤쳐나가는 환자는 정책 설계자가 모델링하지 못한 실패 모드를 이해하고 있다. 질문은, 이 지식을 노이즈가 아닌 시그널로 취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가이다.
완전히는 못할 것 같다. 복잡한 사회는 복잡한 거버넌스를 낳고, 복잡한 거버넌스는 전문성 격차를 낳고, 전문성 격차는 부드러운 배제를 낳는다.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비용에 대해 정직하게 남는 것 — 그리고 배제된 사람들이 그 위치에 합당하다는 능력주의적 위안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제비를 뽑았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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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 『정의론』 (이학사, 2003). “자연의 추첨” 개념은 전체에 걸쳐 등장하며, 특히 자연적 재능이 도덕적으로 자의적이라는 논증에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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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의 차등 원칙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가장 불우한 구성원에게 이익이 되도록 배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롤스, 『정의론』 제13절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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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샌델은 이 연구로 2025년 베르그뤼엔 철학·문화상을 수상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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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학력차별을 “마지막으로 용인되는 편견”으로 묘사한다 — 조사 연구는 저학력자에 대한 경멸이 다른 불리한 집단에 대한 편견보다 사회적으로 더 용인됨을 확인한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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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케이스, 앵거스 디턴,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한국경제신문, 202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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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능력의 유전율에 대한 포괄적 리뷰로 Plomin, R. and Deary, I.J., “Genetics and intelligence differences: five special findings,” Molecular Psychiatry 20 (2015): 98–108 참조. 쌍둥이 연구는 일관되게 성인기 일반 인지 능력의 유전율을 50~80%로 추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