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온 잣대: 경제학자가 철학자를 인터뷰한 이유
2026년 3월 초, Project Syndicate에 Reclaiming Democracy From the Market라는 글이 실렸다. 제목만 보면 공동 저자의 매니페스토 같지만, 열어보면 인터뷰다. 묻는 쪽은 MIT의 다론 아세모글루 — 2024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이며 사이먼 존슨과 함께 Power and Progress를 쓴 경제학자. 답하는 쪽은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 — The Tyranny of Merit(『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능력주의를 비판해온 정치철학자다.1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형식 자체의 비대칭이다. 게재 매체의 선택보다, 누가 묻고 누가 답하는가가 내용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소개 기사는 그 점을 그냥 지나친다.
무엇이 논의되었는가
이런 장르의 글치고는 정책적 처방이 유난히 구체적이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아세모글루와 공저자들이 다른 곳에서 제안해 온 노동과 자본에 대한 보다 대칭적인 세제 구조다. 임금에 대한 세부담과 기계 투자에 대한 세부담의 실효 수준을 맞춰, 세법이 “사람을 고용하기보다 기계로 대체하라”는 인센티브를 조용히 보조하는 구조를 해체하자는 주장이다.2 미국에서 노동에 대한 실효세율은 오랫동안 28%를 웃돌아 온 반면, 가속 감가상각 규정 덕분에 설비·소프트웨어 투자에 대한 실효세율은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눌려 있다. 이 격차를 수십 년에 걸쳐 적분하면, “자동화가 좋은 아이디어인지 아닌지”와는 독립적으로 자동화에 대한 구조적 유인이 누적된다.
둘째, 기술적 공동결정 (technological co-determination) — 독일의 Mitbestimmung(공동결정) 전통을 AI 배치에까지 확장하는 안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 노동자 대표가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에 의결권을 갖는 제도다.3 셋째는 업종 단위 단체교섭 (sectoral bargaining) — 기업별이 아니라 산업 전체 단위의 협상으로, 와그너법 이후의 미국 모델보다 북유럽의 노사 관계에 가깝다.
그리고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양쪽 모두가 이례적으로 직접적인 언어로 거부하는 것이 보편적 기본소득(UBI)이다. 샌델은 자기가 다른 곳에서 길게 펼쳐 온 입장을 반복한다 — UBI는 사람을 “수동적 수혜자”로 다루며, 그가 중시하는 “노동의 존엄”이라는 규범적 무게를 포기하는 설계라는 것이다. 아세모글루의 반론은 한 단계 더 구조적이다. 자동화의 떨어진 이삭을 재분배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 설정 자체를 잘못 잡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진짜 질문은 “어떤 기술을 만들 것인가, 그 기술이 무엇을 대체할 것인가”이지 “대체된 사람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가 아니다.
두 사람이 이 처방 묶음을 표현하는 틀은 사후적 (distributive) 정의 — 시장이 결과를 낸 후 재분배하는 — 에서 사전적 (pre-distributive) 자세 — 결과가 굳기 전에 시장과 기술의 방향을 잡는 — 로의 전환이다.
왜 인터뷰 형식이었나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잘 읽어보면, 정책적 내용은 거의 전부 아세모글루 쪽의 것이다. 대칭적 과세도, 공동결정도, 업종 단위 교섭도, 그가 Power and Progress 등에서 오랫동안 기술적·실증적으로 다듬어 온 입장들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 이 정도로 입장이 확립된 경제학자가, 왜 굳이 철학자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다시 내놓는가.
내 답은 이렇다. 경제학의 어휘만으로는 UBI를 이길 수 없다. 후생 극대화 또는 효율이라는 경제학 고유의 잣대로 비교하면, UBI는 강력한 경쟁 후보가 된다. 행정비용이 싸고, 설계가 단순하며, 포획되기 어렵다. “단위 비용당 측정 가능한 후생 개선”이라는 척도로 보면, 공동결정 기구를 정비하고, 업종별 교섭 인프라를 다시 짓고, 감가상각 일정을 다시 쓰는 길고 정치적으로 비싼 작업보다,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보내는 것이 점수를 따기 쉽다.
샌델의 “노동의 존엄”이 하는 일은 그 잣대 자체를 갈아치우는 일이다. 비교의 질문이 “비용당 후생 개선이 어느 쪽이 큰가”에서 “사회적 기여로 인정받는 자리를 보존하는 조건을 어느 쪽이 지키는가”로 바뀌면, UBI는 단순히 비용 측면에서 진다기보다 자기 문제 설정 안에서 실패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잣대는 옛 잣대와 metric으로서 직접 비교가 되지 않는다. 노동을 소비의 단순한 수단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제학이 단독으로는 거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거부한다.
말하자면 인터뷰라는 형식은 구조적으로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다. 경제 정책의 구체성은 유지하면서 규범적 닻만을 경제학 바깥에서 빌려오는 장치다. 철학자가 기여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정책을 판정하는 잣대다. 이를 “빌려온 잣대 (borrowed yardstick)”라고 부르고 싶다.
이를 환영할지 경계할지는 그 빌려옴의 방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쪽 독해에서는 이것이 건전한 학제적 보정이다 — 경제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규범 어휘를 너무 빈약하게 유지해 왔고, 철학이 지금 그 살을 보태주고 있다. 다른 한쪽 독해에서는 이것이, 노벨상 경제학자조차도 UBI의 수사적 인력에 대해 자기 학문 내부에서 결착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의 고백에 가깝다. 가장 엄밀한 정책 판정자를 자임해 온 학문이, 결착의 마지막 국면을 외주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이다.
기반(substrate)의 문제
인터뷰가 거의 다루지 않는, 더 불편한 문제가 있다. 제안된 제도 개혁들 — 공동결정, 업종 단위 교섭, 도제제도 확대 — 은 모두 그 “제도의 자리”를 채울 조직된 노동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공동결정은 노동자가 기업·업종 수준에서 조직되어 있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업종 단위 교섭은 거기에 속한 조합원이 있을 때 비로소 임금을 안정시킨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나온 노동시장 자료들은, 그 “조직된 노동의 기반”이 반드시 안정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신입 화이트칼라 직무 — 젊은 사람들이 안정된, 조직 가능한 고용으로 가는 통로 — 가 AI에 의한 대체의 영향이 가장 일찍, 가장 또렷하게 나타나는 층이다. 예일의 경영자교육원(Chief Executive Leadership Institute)이 2026년 초 정리한 관찰에 따르면, 가장 일관된 패턴은 대규모 정리해고가 아니라 신입 채용 동결·둔화이며, 그 중심은 첫 직장이다.4 같은 시기에 Anthropic이 공개한 분석도, LLM의 능력 지표와 실사용 데이터를 결합한 위에, AI 활용이 가장 깊이 침투한 직종에서 젊은층 채용이 둔화되고 있다는 시사적 증거를 발견했다.5
이 층이 장기적으로 얇아지면, 샌델과 아세모글루가 손을 뻗고 있는 제도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이미 부분적으로 증발한 일터에 도착하게 된다. 자리는 마련되었지만 앉을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이것이 치명적인 반론은 아니다 — 제도가 자기를 떠받치는 구성원을 거꾸로 불러들이는 사례는 역사에 있다 — 하지만 내가 현재 가장 또렷이 보고 있는 이 처방의 맹점이긴 하다. Power and Progress류의 제도주의는 “규모 있게 조직 가능한 노동자 집단”이라는 20세기형 기반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대체의 형태는 그 기반 자체를 부분적으로 깎아내고 있다.
새로운 능력주의의 위험
또 하나의 맹점은 샌델 자신의 틀 안쪽에 있다. The Tyranny of Merit가 표적으로 삼아 온 것은 학위·시험점수·명문대 입시를 통한 학력자격주의(credentialism)였다.6 그러나 아세모글루가 말하는 “인간 보완적 AI”가 성공해서, 가장 생산성 높은 노동자가 “AI 도구와 효과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일터가 등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새로운 능력 차이 — AI와 함께 갈 수 있는 노동자 vs 그렇지 못한 노동자 — 가 즉각적으로 형성된다. 이 차이는 한때 SAT가 사람들을 분류했던 것만큼이나 가차없이 임금 계층을 만들어 낼 것이다.
“노동의 존엄”은 개념으로서는 강하지만, “어떤 일에 존엄이 부여되는가”라는 구현의 질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방어를 갖고 있지 않다. 실제 AI 일터에서 “존엄 있는 노동자”가 “AI에 능숙한 노동자”와 일치하고, “AI에 능숙한 노동자”가 원래 학력 추첨에서 이긴 층과 지리적·속성적으로 겹친다면, 새로운 어휘는 옛 분류를 다른 이름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앞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
내가 앞으로 추적할 만하다고 보는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빌려온 잣대” 무브가 반복되는가다. 아세모글루급 경제학자가 앞으로도 경제학 어휘 단독으로는 할 수 없는 정당화 작업을 위해 철학자를 계속 초대한다면, 그것은 현대 정책 논쟁에 관한 구조적 사실로서 그 자체로 추적할 가치가 있다. 어떤 학문이 AI와 노동의 논쟁에서 구조를 떠받치는 쪽이 되어 있고, 어떤 학문이 배경적 정당화라는 옛 역할을 맡고 있는가에 대한 진단 재료가 된다.
둘째, 인터뷰가 제시한 제도적 처방이, 특히 미국에서 실제로 건설되는가다. AI에 관한 독일식 공동결정의 발판을 진지하게 짜려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가. 정치경제적 장애물은 만만치 않으며, 인터뷰 자체는 “누가 그것을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백히 침묵한다.
당장은, 이 인터뷰가 가장 잘하고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의 아키텍처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경제학자가 묻는다. 철학자가 답한다. 질문이 정책을 담는다. 답이 규범을 담는다. 독자는 둘을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도록 요청받는다. 그것이 정말로 하나의 입장으로 견디는지, 아니면 AI와 경제 논쟁 안에 있는 더 깊은 불안정성의 표면인지 — 나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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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moglu, D. & Sandel, M. “Reclaiming Democracy from the Market”. Project Syndicate, March 2026. Accessed 2026-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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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moglu, D., Manera, A. & Restrepo, P. “Does the U.S. Tax Code Favor Automation?” Brookings Papers on Economic Activity, Spring 2020. See also Acemoglu, D. & Johnson, S. Power and Progress: Our Thousand-Year Struggle Over Technology and Prosperity. PublicAffairs, 2023. Accessed 2026-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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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eral Ministry of Labour and Social Affairs (BMAS), “Co-Determination”. 2019. See also Wikipedia, “Codetermination in Germany”. Accessed 2026-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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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nenfeld, J. & Tian, S. “The Real Job Destruction from AI Is Hitting Before Careers Can Start”. Yale Insights, 2026. Accessed 2026-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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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ropic, “Labor market impacts of AI: A new measure and early evidence”. 2026. Accessed 2026-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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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el, M.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Farrar, Straus and Giroux, September 2020. ↩